설득 (Persuasion. 2007. ITV)
1. 앤 엘리엇-.
월터 엘리엇의 차녀 앤 엘리엇은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가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지각이 있는 인물이다. 다정다감한 성격에 자신보다 상대를 우선시 여기는 배려심과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겸손함, 그리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신중함을 가진 앤은, 지나치게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과 우유부단한 성격이 단점이기도 했다.
앤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주위에 있는 사람을 우선시하며 도움을 주기에 사람들은 항상 그녀를 좋아해 주고 또한 필요로 하지만 그 존재감이 느끼지 못하는, 공기 같은 존재. 앤은 내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도 않았고 자신의 목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렇게 그 장소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들 주변에 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그들은 앤의 존재를 잊어서 앤을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했고, 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처를 정하게 되고, 어떤 대화 끝에 앤에게 질문을 던지지만 굳이 앤의 대답을 듣지 않으며, 그녀의 존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것은,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앤의 성격도 있겠지만 사치스러운 가족들로 인해서 집은 빚더미에 앉았고 27살의 나이를 먹도록 결혼을 못해서 이제 혼기를 놓쳐버린 앤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주눅이 들어버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보다 27살이 혼기를 놓친 나이라니.. 그럼 나는??? (슬푸다..ㅠ)
2. 프레데릭과의 재회-.
- 앤과 프레데릭의 8년 만의 재회 -
8년 전, 열아홉의 앤은 가난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젊은 해군장교 프레데릭에게 청혼을 받았지만 주변의 설득에 의해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8년 후, 상황은 역전되어 프레데릭은 엄청난 부를 가진 매력적인 해군 대령이 되어 앤 앞에 나타났다. 처음 프레데릭이 이곳에 온다는 것을 알게 된 앤은 눈에 띄는 감정변화를 보여주며 앤에게 있어서 그의 존재는 8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꽤나 크게 자리 잡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그리고 앤은 두려움과 설렘, 보고 싶으나 보고 싶지 않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게 우연스레 찾아온 8년 만의 재회에 홀로 가슴 떨려하기도 했지만, 프레데릭은 그런 앤을 차갑게 무시하며 루이자(앤의 동생 메리의 시누이)에게 관심을 보이게 되고 앤은 그런 프레데릭의 차가운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홀로 상처를 받으며 돌이킬 수 없는 그날의 일을 자책하고 후회하며 아파했다.
앤이 8년 전 그 날의 일에 대해서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의 설득에 그의 청혼을 거절하며 그에게 배신의 상처를 남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갈대 같은 마음을 가진 앤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기에 앤은 자신과 대화는커녕 눈조차도 마주치지 않으려는 프레데릭에게 먼저 다가서지도 못한 채, 그저 멈칫거리며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한 그 마음을 애써 숨긴 채.
3. 프레데릭의 사정-.
8년 전 청혼을 거절한 앤으로 인한 배신의 상처는 커다란 흉터로 남아 프레데릭의 마음 한 켠에 깊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그렇기에 그는 아직까지 미혼이었고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그는 돌아왔고 앤과 재회했다. 그는 어땠을까? 두려우면서도 설레고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은, 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8년 만의 재회. 프레데릭과의 재회에서 더 깊은 자책과 후회를 하며 아파지는 그 마음을 어쩔 줄 몰라하는 앤과 달리 프레데릭은 무관심과 독설로서 그녀를 외면했다. 어쩌면 현재 그녀의 상황과 모습에 실망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의지가 없는 듯이 주변 사람들의 공기처럼 있는 그녀의 현재 모습에서 8년 전 자신이 사랑했던 그녀가 보이지 않아서, 8년 전 자신에게 배신의 상처를 남긴 그녀를 떠올리며 화가 났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는 것을 기억해 낸 듯 애써 그녀에게 무관심해지려고 했다.
그렇게 무의식 중에 경솔한 행동을 하기도 했던 듯싶다.
그렇게 그는 그녀를 의식하고 있었다.
특히, 무의식 중에 앤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앤이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아닌 척, 그렇게 앤의 눈길을 피하고 대화조차도 하지 않으려는 프레데릭이었다. 정말, 대놓고 앤을 무시하며 티 나게 피하는 듯했달까? 그러면서도 그의 신경세포는 온통 앤에게 향해있어서 앤이 위험한 순간에 가장 먼저 달려갔다가 바로 아닌 척 거린다거나 앤이 왜 또 루이자 오빠(현재 메리 남편)의 청혼을 거절하고 아직까지 미혼인가에 대한 이유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을 보이면서 말이다. 어쩌면 프레데릭은 그 이유에 자신이 있길 바라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 이유가 자신이 거절당한 것과 같다는 것에 실망한 듯도 싶었고;
아무튼, 언제 어디서나 앤을 지켜보고 있다- 모드의 프레데릭.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홀로 피아노를 치는 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프레데릭에겐 어떤 아련함이 느껴졌다면, 산책 중 바닷바람을 쐬며 조금 뒤처지는 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앤이 그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리자 바로 바다를 보는 척하는 프레데릭은 좀 귀여웠다.
하지만, 루이자 사건으로 그는 진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 듯싶었다. 프레데릭 자신이 사랑했던 앤이 어떤 여자였는지 기억해낸 듯 했달까? 그리고 앤은 8년 전과 변함없이 다정하고 신중하며 신뢰가 가는 여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듯 싶었다. 뭐, 프레데릭의 표현에 의하면 그녀는 완벽하다고-.
위의 컷은 내가 이 드라마에서 정말 좋아하는 씬으로 프레데릭이 그동안 애써 외면해 왔던 앤에 대한 감정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장면이다. 늘 조용하던 앤이 위기의 순간에 보여준 정확한 판단력과 결단력으로 위급한 상황을 정리하는 모습에서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앤이 여전히 존재함을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싶었던 장면. 그리고, 재회 후 늘 앤의 눈길을 피하던 프레데릭이 처음으로 앤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봤던 장면이기도 했다.
그 후, 마차를 타는 앤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나 앤과 대화를 나누며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등등, 재회 후 처음으로- 인 장면들은 은근한 설렘을 선물했다. 그리고, 프레데릭이 더 이상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눈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눴다는 것에 앤은 그 급박한 상황에서 저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변의 분위기에 맞춰주며 상대를 위해 감정을 절제하던 앤이 처음으로 주변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순간-,이었달까?
그렇게 프레데릭은 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여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자신의 경솔한 행동과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앤의 매력에 꼬여든 늑대 한 마리로 인해서 둘은 엇갈리기 시작한다. 교통정리는 빨리 됐지만 그는 여전히 앤에게서 받았던
배신
거절의 상처가 너무 커서인지 직접적인 고백이 아닌 편지를 통한 간접적인 고백을 하고 말았다. 뭔가, 거절당해도 얼굴 보며 당하는 것보다 이게 덜 상처 입을지도-,라는 주눅 든 마음처럼 느껴졌달까? 그래도 편지내용은 정말 진심이 가득 담겨서 꽤나 절절했다. 대충 요악하면 '니가 아니면 안 돼~ 너 없이는 안돼~' 요런 느낌? (요약하지 맛!)
4. 앤, 사랑을 되찾다-.
프레데릭과의 재회로 인해 8년이란 시간 동안 박제되어 있던 그녀의 심장은 다시금 꿈틀거리게 되며 뛰기 시작한 듯싶었다. 그렇게 프레데릭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설레고 아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깊은 절망 속에서 본 자그마한 희망으로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그렇게 앤은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늘 언니 엘리자베스의 그늘에 가려져있던 앤은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 빛나고 있었다.
그 과정, 존재감이 없던 앤이 조금씩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미약하나마 홀로 빛나게 되는 그 변화의 과정이 앤의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게 되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뭐랄까, 설득당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앤은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프레데릭과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만남을 날려버릴 수 없는 앤은 체면이고 뭐고를 다 버린 채 큰 소리로 프레데릭을 조용한 곳으로 불러내는 행동을 보여줬고, 그렇게 주변인들로 인해 만들어진 상황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일지도 모를 기회를 가만히 서서 날려버리지 않았다.
- 앤 엘리엇 -
약속시간에 방문한 프레데릭은 우연찮게 그 직전에 방문한 앤의 가족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 그 상황에서 앤이 평소처럼 머뭇거렸더라도 프레데릭은 분명 앤에게 자신의 방문목적을 밝혔을 것이다. 그렇게 오해가 풀렸지만 가족들의 방해로 인해 돌아가는 프레데릭을 그냥 보냈더라도 앤은 결국 프레데릭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해피엔딩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앤은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사랑을 되찾기 위해 달려갔다.
떠나가는 프레데릭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달려가는 앤의 앞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정보제공자가 되어주기도 하며 지금 그녀의 선택과 행동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이제 더 이상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을 똑바로 바라보며 어느 누구에게도 설득당하지 않고 굳건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겠노라는 각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앤은 자신의 두 손으로 사랑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제 앤이 자신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8년 전 자신을 설득한 이들에게 되려 설득했을 듯싶었다.
이 남자가 바로 내 운명이었다,라는 것에 대한-.
5. 그리고-.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히며 헤어진 연인이 8년 후 정 반대의 상황이 되어 재회하게 되고 오해와 갈등과 엇갈림은 있었지만 결국 사랑에 빠지고 결실을 맺는다는 내용-, 의 이야기.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그렇다. 이 드라마 <설득>은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작품이다.
2008년에 처음 접한 드라마였다. 당시 약속시간까지 텀이 있어서 보다가 빠져들어 약속시간에 늦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오랜만에 찾아보며 역시나 재밌다며 즐거워했고, 근래 갑자기 또 생각나서 부랴부랴 챙겨봤다. 그리고, 전에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에 정신없이 설레어하며 어쩔 줄 몰라했더랬다. 그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보이고,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감정들이 다가오며, 그 어떤 장면 하나도 빼놓지 못한 채 그렇게 정신없이 봤던 것 같다. 몇 번을 돌려보면서-.
앤의 감정선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함인지 클로즈업해서 미세한 표정까지 잡아내주는 등등 앤의 감정선이 섬세하게 그려진 드라마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런 앤의 변화를 거부감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앤에게 '설득'당해버리기도 했고 말이다. 앤 엘리엇을 연기한 배우 샐리 호킨스의 연기도 꽤나 좋았다.
사실, 앤 위주로 쓰고 싶었지만 쓰다 보니 프레데릭 웬트워스 대령의 이야기가 훨씬 많아져버린 듯싶다. 앤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드라마를 봤지만 결국 나도 여자인지라 프레데릭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달까? 앤에게 빙의되어 봤기에 프레데릭의 행동 하나하나에 내가 반응을 보였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 좋아서 어디 버릴 데가 없는, 그래서 하나하나 캡처해서 꺄아모드-로 끄적이며 올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아서 겨우 마음을 다잡은 중이다. 볼 수록, 곱씹을수록 매력 있는 드라마다. 볼 수록 내가 미처 몰랐던 감정, 그리고 놓쳤던 것들이 느껴지고 보여서 몇 번을 더 볼까,라는 생각이 들고 말이다.
덧 1) '설득' 소설까지 급 질렀다. 찬찬히 읽어봐야지!
덧 2) 매력이 철철 넘치는 제인오스틴의 남주들! 이래 봤자 셋은 그냥저냥; (에드먼드-에드워드-헨리)
덧 3) 뭐, 영상화된 작품으로만 봤지만. 언젠가 원작 읽고 나서 판단해 드리겠습니다, 셋은.
덧 4) 앤의 언니 엘리자베스는 앤보다 2살 많은 설정인 듯한데, 아버지랑 동갑처럼 느껴졌던;
덧 5) 앤의 동생 메리는 어쩐지 언니 앤에게 자격지심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살짝 짜증유발 캐릭;
덧 6) 사실, 라임에서 앤과 벤윅사이에 썸씽이 있을 줄 알았는데..... 무튼, 벤윅은 쉬운 남자였음;;
덧 7) 하빌은 프레데릭과 앤의 관계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듯했다. 첫인사에서 그런 뉘앙스가 팍팍!
덧 8) 앤과 프레데릭이 8년 전 어떻게 만나 어떤 사랑을 나눴는지가 궁금. 그건 상상에 맡긴다는 건가?
덧 9) 좋았던 장면이 너무 많다. 일일이 캡처해서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로-.
덧 10) 너무 설레어하며 본 드라마인지라 쓰는 내내 이게 아닌데-, 라며 끝없는 수정. 발행할 때까지 이러겠지?
덧 11) 찬찬히 대충 일주일에 걸쳐서 읽을 예정이던 소설을 받자 마자 한숨이 읽어 내렸다. 완전 재밌음+.+
덧 12) 책 읽고 난 후의 감상은 또 다르지만,... 이 것도 내 감상이므로 그냥 두기로. 그보다 언제쯤 발행?
덧 13)... 내친김에 DVD도 질러버렸다. 오래도록 소장해 주겠노라~! 라며;
덧 14) 영국 ITV에서 방영된 거로 알고 있는데 DVD에는 BBC라고. 뭐지...?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덧 15) 책에는 프레더릭. 내가 본 드라마 자막에는 프레데릭. 몰라-. 그리고 나는 '대령님+.+'
덧 16) 대령님+.+ 혹은 웬트워스 대령이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었다. (...;)
덧 17)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면, 언젠가 BBC에서 다시 이 소설을 드라마화할 생각이 있다면, 4부작쯤으로?
덧 18) 각색이 심한 게 아쉬우면서도 맘에 드는 부분도 많고, 그래서 난 여전히 이 아이가 맘에 든다.
덧 19) 1995 버전은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편-. 갠적으론 2007 버전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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