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시청담/국내 드라마 시청담

왕녀 자명고 : 문득 떠오른 아이

도희(dh) 2016. 1. 25. 12:51

어쩌다보니 아주 오래 전의 포스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드라마 '자명고'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어서 문득 떠올라버렸다. 이 드라마는 방영 당시 상당히 재미있게 봤었던 드라마이다. 또한, 조기종영으로 인해 극 마무리가 매끄럽지 못해 늘 아쉬움으로 남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많이 아꼈던 것에 비해 종영 후 가끔 생각나는 장면들을 훑어보기는 했으나 제대로 복습한 적은 전혀 없으며, 당시 상당히 열과 공을 다해서 썼던 리뷰들은 현재 비공개 상태이다. 언젠가는 보수작업을 거친 후 공개전환을 하려고 생각 중인데, 어쩐지 오글거려서 관둘까, 싶기도 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드라마를 제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편이라 그런지 드라마 자체에 빠지기는 해도 캐릭터 자체에 빠지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다. 극 중 어느 캐릭터가 좋다- 라는 것과 그 캐릭터 자체에 빠졌다- 라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는지라. 그리고, 그 많지 않은 경우 중 하나가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낙랑공주 라희다. 라희는 다른 두 주인공들에 비해서 보여지는 상처는 그리 크지가 않다. 그래서 그들 입장에서 보자면 이 아이의 상처는 그저 배부른 투정으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상처의 크기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나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이 아이가 아리고 아팠다.그래서 오로지 이 아이의 시선과 입장으로 드라마를 보며, 답지않게 피의 쉴드를 쳐주기도 했더랬다.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했던 이유. 나아가 라희에게 빠졌던 이유는, 이야기 전개가 느릴지언정 그 과정이 상당히 섬세하고 탄탄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역부분이 상당히 길었던 만큼 각 캐릭터들의 성격과 사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당위성을 만들어 주었고 결국 그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극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것이다. 라희 또한 그러했다. 기나긴 아역부분 내내 스토리가 쌓여가는 시간동안, 라희의 이야기도 차곡차곡 쌓여가며 어렸던 이 아이가 두 엄마에게 받은 각기 다른 상처와 그로인한 결핍에 대한 부분은 후에 이 아이가 보여줄 행보와 선택에 당위성을 마련해준다. 그래서 나는 태녀로서의 위엄과 긍지가 있던 이 아이가 결국, 자신의 결핍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질투와 사랑의 감정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지며 점점 무너져가는 모습이 이해가 되어 내내 아팠고 짠했던 것 같다.

 

죽은 자명이는 사랑할 수 있지만 살아있는 자명이는 사랑할 수 없노라며, 자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라희. 라희가 가진 질투와 사랑의 감정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명이가 있었다. 라희는 자명이의 모든 것을 앗아간 아이였으나, 정작 라희가 가장 갈구하는 것은 자명이의 몫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을 다 가진 자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의 마지막 남은 하나를 갖지 못해 안달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을텐데, 나는 이런 라희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라희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자명이에게 빼앗겼노라 생각하는 아이였으니까. 그게 극악스럽다기 보다는 아프게 다가왔던 것은 그만큼 이 캐릭터의 구축이 잘 되어있었다는 의미겠지.

 

 

결국, 라희는 보답 받지 못할 사랑에 자신은 물론 나라의 운명까지 내걸게 된다. 그로인해 나라는 멸망하고 아버지는 죽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만 시간을 돌려 다시 그때로 되돌아 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라희는, 실덕失德한 태녀로서 백성들의 심판을 피하지 않기로 한다. 자신 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로 인해 그녀는 어떤 형태로든 호동의 마음에 남게 되었으며 호동의 아내로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그녀의 엄마들은 함께 죽는 것과 자신을 던져 그녀를 살리는 것, 각자 다른 선택으로 그녀를 지키고자 한다. 

 

모하소는 라희와 함께 백성들의 돌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오랜 시간 감춰왔던 진심을 털어놓게 되는데 그 말을 들은 라희는, 어린 시절의 그날 이후 살아오는 내내 허기졌던 마음이 비로소 채워지게 된다. 그렇게 죽을 운명으로 태어났으나 생모의 계략으로 신탁을 받은 아이와 바뀌게 되며 화사하게 빛나는 아이로 자란 그녀는,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점점 무너져갔고, 급기야 나라를 팔아먹은 죄인이 되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로서, 엄마들의 사랑을 받는 아이로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너무 오래 전의 드라마인지라 내 기억이 확실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막연히 떠오르는 기억과 이미지로 라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 것이다. 이 드라마의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꽤 많다. 모든 캐릭터에게 당위성을 부여한 것과 달리 극의 중심이 되는 자명이와 그 주변 사람들에 관해서는 불친절했다는 점. 낮은 시청률로 인한 조기종영으로 인해 변화의 과정이 많이 사라지며 자명이의 선택과 행보에 공감도가 낮았다는 점. 또한, 같은 이유로 극 내내 느긋한 전개로 촘촘하게 이어져오던 스토리는 어느순간 휘청이며 급하게 달리다가 겨우 매듭을 지어버린 부분들. 등등.

 

특히, 국내에서 흔치 않은 타입의 사극인지라 이 드라마가 망한 것이 가장 아쉽다.소재도 상당히 매력적이고, 극 중 캐릭터들도 매력적이었던 드라마. 아역파트에 무려 13회차를 쓴 패기넘쳤던 드라마. 소재 자체가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되는지라, 자명고의 설정을 어떻게하든 그건 알아서 하고, 위엄과 긍지가 넘치는 낙랑공주와 야망꾼 호동왕자의 차갑고 서늘하지만 뜨겁고 아픈, 그런 정치로맨스 사극이 나올 가능성은 없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