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깜박이는 커서 옆으로, 방금 새긴 문장을 진솔은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건이 썼던 짧은 편지였다. 건네주지 못한 시집 속의 구절. 누구를 향한 사랑들인지, 대상은 모두 빠져 있는 그 구절. 그래서 내 것이기도 하고 그들의 것이기도 한 서글픈 바람... 자판 소리와 함께 아래에 또 하나의 문장이 찍혔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하기를
백페이스를 눌러 지금까지 끼적거렸던 문장들을 밑에서부터 차례로 다 지워버리고는, 파워를 끄고 노트북을 닫았다. 방금 쓴 문장은 말이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서로 부딪치는 사랑, 동시에 얽혀 있는 무수한 사랑들. 어느 사랑이 이루어지면 다른 사랑은 날개를 접어야만 할 때도 있다. 그 모순 속에서도 사랑들이 편안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눈물 흘리더라도 다시 손 붙잡고 밤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건 무슨 마음인지. 무사하기를. 당신들도 나도, 같이.
-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p.395 -
오다가다 스치며 제목만 들었던 소설. 다이어리를 받기위해 오만원을 채워야했고 그래서 문득, 구입했다. 서정적인 로맨스 소설이라는 평은 들었는데, 평 그대로였다. 간간히 남주인공 건의 시점 보여지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여주인공 진솔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며 그녀의 일상과 감정을 따르는 이 소설은, 소소하고 잔잔하고 고요한, 담담하게 읽는 순간, 마음 속에 스며드는 그런 책이었다.
굉장한 흡입력으로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진솔과 건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계속 책장을 넘겼던 것 같다. 그 와중에 못된 습관이 나와서, 긴장감이 툭 끊겼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사실, 이 책이 내 마음에 스며든 것은, 진솔과 건의 로맨스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들이었다. 진솔이 거닐던 공간, 진솔과 건이 함께하던 공간, 진솔과 건 그리고 애리와 선우가 함께 마주하던 공간, 그 공간들은 나에게도 이미 익숙했기에 읽는내내 기억을 더듬어 떠올려보게 되었고, 그렇게 이젠 더이상 일상일 수 없는 공간에 대한 그리움과 약간의 후회가 겹치기도 했다. 이 소설은 뭐랄까, 고즈넉한 서울의 풍경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일상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이 소설을 일 년 정도만 일찍 읽었다면, 떠나오기 전,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공간들을 한 번씩 둘러보고 싶었을 것 같다.
그리고 또 스며든 마음에는, 담담하게 읽는 어느 순간 눈 앞에 펼쳐지는 몇몇 장면들이었다. 새벽녘 따뜻한 캔커피를 들고 마포대교를 걷는 두 사람, 스무디를 먹으며 나란히 앉아있는 두 사람, 건에게 고백하는 진솔, 어둠이 내려앉은 창경궁을 거니는 두 사람의 뒷모습, 눈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의 슬프고도 뜨거운 키스, 남양주 시골집에서 나란히 서서 설거지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 차를 세워두고 담배를 피우던 건과 그런 건에게 달려온 진솔.. 그렇게 마주보는 두 사람, 등등, 이 소설은 그렇게 순간 순간, 건과 진솔이 서로에 대한 마음이 스며들 듯 깊어지는 그 순간 순간의 묘사가 눈 앞에 그림처럼 펼쳐지곤 했다. 풀샷으로(ㅋ) ...새삼, 내가 그림을 못그린다는 것이 아쉬웠다. 내 눈 앞에 펼쳐진 그 장면들은 그저 언젠가 희미해질 마음 속 기억으로 남겨둔다는 것이...
너무 너무 재미있어서, 여운에 허덕이며 어쩌지 못하는 그런 소설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대로 잔잔하고 고요한, 소설이기에 담담하게 읽어냈고 그렇게 어느순간 스며든 감정은 책을 덮는 순간 잠시, 물결치는 정도였다. 그 물결을 각인시킨 것은 ... 이 책을 읽은 날을 기억하고 싶다는, 잠결의 오기. 그 오기는 결국, 책에 삐뚤빼뚤 엉망인 글씨로 기억을 심어뒀고, 심은 순간 후회했다. 대체 내가 책에 무슨 짓을 한거야!!! 라며. 어찌되었든, 덕분에 나는 이 책을 펼쳐볼 때마다, 2014년의 크리스마스에 이 책을 읽었고, 고즈넉한 서울을 떠올렸고, 진솔과 건을 만났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후회로 범벅된 마음을 위로하고 토닥여보지만, 전혀 안괜찮다. 여전히, 괜찮아지지가 않는다.
어찌되었든, 덕분에 올해부터 나는 크리스마스하면 이 책이 떠오를 것 같다. 사실,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다가 요 몇년은 인상깊은 기억이 없었고, 그렇다면 나는 올해도 기억하지 못할까봐, 올해 크리스마스의 일부였던 이 책에 그렇게 기억을 심어놓은 것이었는데... 기억을 해도 괜찮겠다, 하고싶다, 라고 생각했던 건... 이 책이 지금의 계절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늦가을에서 늦겨울까지의 시간적 배경, 그 속에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간이 함께 포함되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뭐, 그래서 그런 것도 같다. 그래서, 나는 매 년 크리스마스에 이 책을 떠올리고 읽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런 생각은 했다. 내가 조금 더 감성적인 시기에 이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조금 더 감수성이 풍부하던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조금 더 감성이 촉촉히 젖어있던 그런 어느 날 읽었다면 어땠을까. 감성이 건조하게 메마른 요즘의 나에게는, 담담하게 읽어내리는 어느 순간 스며들던, 책을 덮는 순간에 작게 물결치는, 딱 그 정도의 소설이었다.
덧1)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시기는 2004년. 그 때는 없고 지금은 있는 단어로 설명하자면 진솔의 고백 전까지, 진솔과 건은 썸을 타고 있었다. 그리고, 진솔을 대하는 건의 행동은 그녀에 대한 호감 이상처럼 느껴졌는데 진솔의 고백에 대한 그의 대답이란... 너무 오래 한 여자를 습관처럼 사랑해온 건은 자신에게 다가온 새로운 사랑이 사랑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마음이 이끄는대로 행동했던 것 같다. 의식하지 못한 채. 그리고, 서서히 감정을 깨닫는 과정에서 발생한 돌발적인 상황 속에서 튀어나온 순간의 진심으로 인해 진솔이 떠나게되고, 그렇게 그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 것인가... 싶더라. 아마도 진솔이 겁을 먹고 마음을 닫고 그에게서 달아난 건 아직은 혼란스러운 그가 제대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기에 자신을 향한 그의 사랑에 확신을 갖지 못했고, 그래서 잔잔하고 평온하게 살아가고 싶은 그녀는 그를 사랑 함으로서 아프고 힘든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달아난건 아닐까, 싶었다.
덧2) 감정의 흔들림 없이 잔잔하고 고요하게 살아가고 싶은 진솔, 일과 사랑에서 권태로움과 무기력함을 느끼던 건. 건을 만난 진솔의 일상은 끊임없이 물결치는 감정 속에서 더이상 고요하지 못했고, 진솔을 만난 건의 일상은 진솔을 통해 흥미와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멈춰져 있던 일상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내게 된 것 같았다.
덧3) 2~4부작 정도의 연작극으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진솔의 일상과 감정 위주로 흘러가는 전개인지라 사건의 거의 없는 편이라... 만약 영상화 된다면 각색을 잘해야 할 것도 같다. 책의 분위기를 잘 살린다면 서정적이면서도 담백한 드라마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더라. 이왕이면 연출은 김진원 감독으로. 난 이 분의 담백한 연출이 좋다. ...그냥 실현 가능성은 안보이지만 끄적여봤다. (ㅋ)
덧4) 낯가림이 심하고 소심한 진솔은 건 앞에서 진실되고 솔직해진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술술 한다. 그렇게 공진솔이 살아온 삶의 일부를 보여준다. 건은 그런 그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편에 속한다. 건은 자신의 일상에 그녀를 데려와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준다. 가장 친한 친구들을 소개시켜주고, 가족들을 소개시켜주는 것으로. 그렇게 둘은 조금씩 조금씩 서로를 알아간다. 그렇게 알아가고 스며들고 마음에 맺히고 그렇게 사랑을 하게되는 ... 그런 이야기이다.
덧5) 어쩐지 자꾸만 하고싶은 이야기가 몽글 몽글 생기는 중이다. 이래서 책을 읽고나면 독후감을 써야하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이게 독후감은 아닌 것도 같다. 아무튼, 이렇게 주절거리다보니 곱씹게 되고 그러다보니, 또다시 내 마음은 작게 물결친다. 그래도, 혹은 그래서, 이 즈음에서 끝내는 걸로. 여기까지.
바람 부는 갯벌에서, 건에게 물었었다. 왜 내가 그립냐고.
그는 그냥, 이라고 했다. 그래서 진솔은 사랑이라고 믿지 않았다.
지금은... 그녀도 그가 그리웠다. 그냥, 그리웠다.
-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p.3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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