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한가한 극장

영화) 만추 : 늦은 가을, 시간이 채워지는 계절

도희(dh) 2011. 4. 12. 04:35

 

만추

감독 ㅣ 김태용
출연 ㅣ 현빈 (훈), 탕웨이 (애나) .. 外




4월의 마지막 날, <만추>를 봤다.

기대를 했던가? 그런 건 없었다. 보고싶었다던가? 그런 것도 없었다. 글이 좋아 가끔 들르는 블로그에서 소식을 들었고 예고를 봤고 막연히 '흐음, 느낌이 괜찮아' 라는 정도였다. 느낌이 괜찮아, 정도의 호감을 느낀 영화지만 남주인공이 근래 최고 인기를 누리는, 여전히 그 열기가 식지않는 스타라는 점에서 살짝 한발 뒤로 물러섰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신드롬급의 그런 걸 좀 거북해하는 편인지라. 원래 좋아하던 연예인이자 호감가는 배우였지만, 대중의 엄청난 관심을 받는 '스타'가 되자 흠칫거리며 나도 모르게 한발 물러서게 되며 묵묵히 바라만 보게 되었다고 해야할까?

그런데 보게되었다. 무료로 볼 기회가 있었고 굳이 마다할 필요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언젠가 봤던 예고에서 느낀 그 것이 맞았는지를 알고싶기도 했고.   그리고 영화는 기대이상으로 괜찮았다. 기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례한 관객들 속에서 꽤나 집중하며 흥미롭고 재미있게 몰입하며 봤으니 말이다. '무례한 관객들' 속에서도 그만큼의 여운이 남았다는 것 자체에 대한 놀라움 한 줌.

무례한 관객들 속에서도 몰입하고 긴 여운을 느낀, <비몽> 이후로 두번째 영화. 몇일간 홀로 곱씹었던 <비몽>과 달리 달랑 하루 반나절을 곱씹은 것은, 하릴없던 그 때와 달리, 해야할 것이 많은 날들이라 영화 하나를 오래 곱씹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변명 한 줌 더.

현빈이란 배우만 아니었다면 보지 않았을 것이란 너의 투덜거림에 맞서기라도 하는 듯, 현빈이란 배우가 나오지 않았더라도 봤을 것이라는 나의 반발. 문득 생각했다. 근래 최고의 인기를 얻고있는, 그 덕분인지 늘 반도 안차던 극장이 가득 메워진 이 현상이 득일까 실일까, 에 대한. 여기 이 관객들은 김주원을 보러 온 것일까, 현빈을 보러 온 것일까, 에 대한 의문.

이 영화가 끝난 후, 자꾸 떠오르는 건, 애나. 탕웨이였다.


※ 경고 : 스포덩어리!!!!!!!!!!!!!!!!!!!!!!!!!! 피해가셔도 좋습니다.

7년 전인가, 8년 전인가... 남편을 살해한 애나는 현재 교도소 수감 중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빠가 내준 보석금으로 얻게된 72시간의 자유.   그러나 애나에게선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레임도 기쁨도, 슬픔 조차도.  그저 언제나처럼 오늘도 어제처럼 그렇게 흐르고 있고 그래서 변해버린 낯선 세상에 대한 어색함에 멈칫거리고 있었을 뿐이다.

애나의 시간은 멈춰있었다. 첫사랑과 가족들이 가정을 꾸리고 또 다른 가족을 이루어 살아간 그 시간동안, 애나의 시간은 그때 그대로였다.  모두에게 과거인 그 시간이 애나의 현재였다. 그렇게 애나의 시계는 멈춰져 있었고, 이방인이었다.

어느 순간, 72시간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던 것도 같았다.   멈춰진 시계에 태엽을 감고 그렇게 조금이나마 흘려보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서 있는 세상에 속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나는. 그러나, 그 순간 걸려온 전화는, 니가 있어야 할 곳은 거기가 아닌 여기, 라고 말하고 애나의 시간은 또 다시 멈춰졌다. 시간이 멈춘 애나는, 여전히 낯선 이방인으로서 세상에 서 있었다.


 

그런 애나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며 멈춰진 시간이 흘러가도록 만들어 준, 훈, 이라는 한 남자. 애나는 갑작스레 나타났다 사라지고, 또 나타나는 훈이란 남자를 통해 멈춰진 시간을 흘려보내며 잊었던 감정이란 것을 되찾게 되었다. 훈과 함께있는 동안의 애나는 더이상 이방인이 아니었다.

훈을 통해 다시 시간을 흘려보내고 그렇게 감정을 되찾으며, 멈춰져있던 시간동안 가슴에 담고있던 그 모든 것을 토해내는 애나.   그렇게 이 영화는, 고통스런 그 날의 상처를 그저 가슴 속에 품고 시간을 멈춘 채 살아가던 애나가, 훈을 통해 하나 둘 풀어내며 한 걸음 걸음, 감정이란 것을 드러내며 시간에 발을 내딛는 과정이 그려졌다.

좋다/싫다, 라는 중국어 두 마디를 아는 훈. 그리고 그런 훈에게 가슴 속에 담아뒀던 지난 이야기를 중국어로 말하는 애나. 그리고 애나의 표정과 분위기로 자신이 아는 중국어 두 단어로 장단을 맞춰주는 훈. 애나는 훈이 자신의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기에 풀어냈지만, 눈치껏 장단맞춰주는 훈이었기에 그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의 등장. 포크. 그리고 애나의 대성통곡. 늘 무덤덤하던 그녀의 감정폭발.
그렇게 애나의 시간이 흘렀다. 그녀 스스로의 힘으로.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 사랑이 찾아왔다.

해피엔딩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해피엔딩이 되길 바랬다. 애나가 이젠 행복해지길 바라고 또 바랬기에.   그래서 나는, 버스 안에서의 대화. 그 것이 이 이야기의 엔딩이 되길 바랬다.   그러나 그 것은 모든 이야기가 주는 공식. 뒤에 있을 비극을 대비한 행복의 절정.

함께 관람한 분은, 위증일 지언정 애나가 증인이 되길 바랬다고 했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애나가 모르길 바랬다. 그 것이 훈이 바라던 것이기에. 훈은 애나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나에게만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또한 그랬다. 사람에게 상처가 많은 애나에게 훈만은 언제나 좋은 사람으로 남길 바랬다. 시간을 선물해주고 갑자기 사라진. 신기루 같은. 그래서 그립고 또 그리운, 좋은 사람.





애나의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아마, 애나에게 다시 시계를 건넨 훈의 시간은, 그 순간 박제되어 멈췄을 것이다.
또한, 애나의 흐르는 시간 속에서 훈과의 그 마지막 순간은 영원이 박제되어 있을 것이다.

그 후로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애나는 살아갈 것이다. 더이상 시간을 멈추지 않은 채.

훈이 주고 간 시계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겠지?

만추. 늦가을.
그리고 나는 시간이 채워지는 계절이라고 불렀다.
훈의 시계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애나는 그동안 잃어버린 시간을 채워가며 살아갈 것이고..
그리고 그 시간이 다 채워진 순간... 또 다른 시간이 시작되지 않을까, 라며.


사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1) 정말 매력적인 배우, 탕웨이. <파이란>의 장백지 이후로 이쪽나라 배우에게 흠뻑 젖는 건 간만인 듯 싶다.

2) 애나의 가족들, 정말 미웠다. 당연한 감정이기도 하겠지만, 미웠다. 그런 부분으로 인해서 가족들 속에서조차 붕 떠버린 애나의 외로움과 고립을 더욱 크게 느껴지게 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무튼, 난 속으로 '애나! 도장찍어 주지마!'라고 외쳤더랬다;

3) 난 영화나 공연을 볼 때 옆에서 툭툭건들며 말거는 거 진짜 질색팔색 거리는 편이다. 그런데 한참 보는데 '현빈 옷 주머니가 꼭 저기 있어야 할까?' 라며 웃으며 말을 거는데... 집중하다가 순간 뜨아거렸다. 물론, 사뿐히 즈려밟긴 했다만...(;)

4) 3월엔 영화를 꽤나 많이 봤는데, <만추>가 가장 마음에 오래 남는다. 맨 마지막날 봐서 그런것만은 아님;

5) 난 현빈이란 배우는 좋다.   그러나 스타가 된 현빈은 버겁다.   난 그래서 오늘도 언제나처럼 내 배우가 연예인 혹은 스타가 되지 않길 바라는 중이다. 근데 요즘은 대부분 연옌겸업의 길로 가시고 계시니... 좀 슬프긴 하다. 아무튼, 그냥 내 배우는 그저 배우이길 바란다고 해야할까? 하하. 내게 배우와 연옌과 스타는 서로 다른 부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차이라고 해야하나???

6) 영화 <만추>는 리메이크 영화라고 한다. 그리고, 4월 14일부터 17일까지 시네마테크(www.koreafilm.or.kr/cinema)에서 <만추 특별전>이란 이름으로 약속(約束)>(사이토 코이치,1972), <육체의 약속>(김기영,1975), <만추>(김수용,1981), <만추>(김태용,2010) .. 이렇게 네 작품을 무료로 상영한다고 한다. 집에서 버스타고 30분 거리인지라 갈까말까 고민 중!

7) 훈은, 여린 사람이었다. 꿈이 있지만 현실에 부딪혀 어떻게든 살아가는, 꿈을 잃지않고 살아가는, 여리고 따뜻한 사람. 따뜻하고 또 그래서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 그래서 ...(ㅠ)

8) 스포덩어리 영화 <만추> 리뷰 끝!